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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학교 14기 및 동문 제위들, 중국 광저우를 가다조선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어린 광저우 답사
김순조 기자 | 승인 2023.12.22 18:27

광저우는 2000년 역사를 지닌 동양 최고(最古)의 무역도시이자 동서양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출발점이었다.

1757년 건륭황제가 ‘대외통상상유(对外通商上谕)’를 반포하면서 청나라의 대외무역은 광동세관으로 일원화(一口通商)해서 대외에 개방되었다. 이때부터 광저우는 중국 유일의 항구도시로 성장하며 ‘황제의 남쪽보물창고(天子寳库)’로 불릴 만큼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19세기엔 무역량이 상하이의 3배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 세계 화교의 약 3분의 2는 광저우에서 퍼져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일찌감치 무역도시로 성장한 까닭에 해외 진출이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광저우는 항일독립투쟁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11년 쑨원이 난징에서 청을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으로 중국에서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이들 민족의 청년들에게 학업을 지원한 국민당 정부의 정책은 독립운동을 지향하던 우리의 한인청년들을 광저우로 불러들였다.

국민당 전신인 동맹회(同盟会)의 최초 한인회원 김규홍, 상하이에서 손문을 만나 광저우에서 한국독립후원회를 조직하고 한인청년들의 교육기반을 마련한 심산 김창숙, 1924년 쑨원과의 회담에서 한인청년들의 교육과 한국독립지원을 논의하고 중한협회를 창설했던 신규식의 임시정부 외교대표단, 장제스를 만나 한인청년입학 우대조건을 받아낸 여운형과 손두환 등의 노력으로 한인청년들이 광저우로 모여들었다.
이런 연유로 우리 대륙학교는 이번에 광저우에서 중산기념당, 손중산독서사처, 루쉰기념관, 기의열사능원, 황포군관학교옛터 등지를 직접 답사하게 됐다.

​11월16일 새벽 6시30분 인천공항에 집결, 어여쁜 영주 사무처장의 노련하고 꼼꼼한 인솔 아래 수속을 마치고 광저우로 향했다. 오후 1시30분경 광저우 백운공항(白云机场)에 도착, 남항명주호텔(南航明珠大酒店) 식당에서 현지식 점심을 먹는 것으로 일정이 시작됐다. 한낮 기온이 22~24.5도 가량이라 더위를 심하게 타는 나로선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식사 후 버스로 30분가량 이동, 서한 남월왕박물관(西漢 南越王博物馆)에 갔다. 이 박물관의 발견은 중국의 기원전 역사를 새로 쓰는 일대 계기가 됐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1) AAAA등급 국가공인박물관​, 광저우 서한남월왕박물관(广州西漢南越王博物馆)
유방과 항우가 중원의 패자 자리를 두고 각축전을 벌일 때, 광저우에는 봉건국가인 남월국(南越国)이 등장했다. 남월국은 기원전 203~111년까지 93년간 광둥(广东)과 광시(广西) 일대, 베트남 북부까지 통치했는데 발견 전까지 남월국에 대한 기록은, <사기>에 등장하는 2,400자가 전부여서 생활상이나 문화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1)-1. 문제행새文 옥새 발견​
 1983년 공사 현장에서 7개의 방으로 구성된 ‘士’자 모양의 지하무덤이 발견되면서 남월국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 무덤에서 ‘문제행새(文帝行璽)’라고 새겨진 금도장(옥새)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남월국 제2대 임금인 문제(文帝, 기원전 137~122년 재위)라는 것이 밝혀졌다.
도굴 흔적 없이 온전히 발견된 무덤에는 옥벽(玉璧), 편종, 바둑판 등 문제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품 1,000여 점과 15명의 사람이 함께 순장되어 있었다. 박물관이 있는 곳은 바로 이 지하무덤이 발굴된 자리여서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1)-2. 지하무덤옛터(墓屋原址, mùwūyuánzhǐ​)
3층으로 올라가면 ‘土’자 모양의 문제무덤 옛터(文帝墓屋原址)가 복원돼 있다. 무덤에는 모두 7개의 방이 있는데, 맨 앞의 서쪽 귀퉁이방(西耳室)에서 페르시아산 은합, 아프리카 상아, 남색유리 등 진귀한 유물이 출토되어 해상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방에는 사진과 함께 설명이 전시돼 있고 출토된 실제 유물들은 지하 무덤 뒤편 전시관에 여섯 개 테마로 나눠 전시되어 있다.

 

 

(1)-3. 사루옥의(丝缕玉衣, sī lǚ yù yī)
가장 흥미로운 유물 중의 하나가 작고 네모난 옥을 실크로 꿰어 만든 ‘사루옥의(丝缕玉衣)’다. 당시 황제나 제후 등 고급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수의인데 옥으로 염을 하면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데서 연유한다. 붉은색 비단실로 1,191조각의 옥을 완벽하게 연결했다(고 한다)는데 전시물은 원형이 아니고 복원된 모형으로 실제 옥조각과 비단실은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머리 부분은 영혼이 하늘과 통할 수 있게 동그랗고 커다란 옥으로 만든 것이 흥미롭다. 남월왕의 나이를 40대 중반으로 추정하는 근거인 치아, 관속 사루옥의 위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발견된 진주 알갱이도 눈길을 끈다. 이어서 우리는 중산기념당으로 향했다.

 


(2) 중산기념당(中山纪念堂​)
중산기념당은 중화인민공화국 광저우시(2호선 기념당역)에 자리하고 있다.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하던 1929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31년에 완성했다.

우리에겐 손문(孫文)으로 익히 알려졌고 (손일선 Sūn Yìxiān)으로도 불리는 쑨원은 외과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을 이끈 혁명가, 중국공산당의 창립자이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청나라 광둥성 샹산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 재학 중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제창했다. 1905년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해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쑨원은 난징(南京)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와 타협, 같은 해 3월1일 위안스카이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같은 해 3월10일 대총통직까지 넘겨주었다. 그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이듬해인 1913년 중화혁명당을 결성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연공, 농공부조: 联蘇,联共,扶助農工)의 3대 정책(소련과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을 채택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국공합작이 결정되자 쑨원은 중국혁명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광둥에 文·武 두 학교를 설립게 했다. 바로 군사 인재양성 위주의 황푸군관학교와 정치전문 인재양성의 터전이 되는 국립광동대학(중산대)이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정부를 수립하고 7월 무한정부가 붕괴되자 1924년 1월부터 지속되어온 제1차 국공합작이 무너졌다. 4월부턴 공산당 등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공산당원 등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시작되어 유학생들은 귀국하거나 상해, 무한, 노령 등지로 떠났다.

쑨원의 묘는 난징(南京)에 있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크게 일조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68년 12월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우리가 갔을 때 쑨원기념당은 곳곳에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보수 중임에도 쑨원동상 뒤로 기념당의 현판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온다. “天下为公” 천하는 인민(모두)의 것이다! 조금도 개인적인 것이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가 기념당 안 전시관에 걸린 “博爱(박애)”라는 수자(绣字)와 함께 쑨원의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3)월수공원(越秀公园​)
중산기념당 정문 맞은편엔 2차선 왕복도로를 사이에 두고 쑨원의 독서사처가 있고 그 자리에 기념탑이 있다. 워낙 넓은 면적의 공원이라 기념탑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를 떴다.

(3)-1. 저녁식사, 오문가(澳门街​)
근처 월수구 중산로(越秀区中山路)에 위치한 아오먼지에(澳门街)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각종 신선한 해산물과 육류 등의 다양한 요리가 풍성한 식당이다. 접시마다 재료들과 어우러져 넘칠 듯 건고추가 그득했는데 비주얼관 달리 내겐 매운맛이 거의 느껴지질 않는다. 꿔바로우(锅包肉)가 맛있는 곳이라는데 정작 먹어보니 너무 달아서 한국의 니하오마라탕 서대문점 꿔바로우만 못한 느낌이다.

―글: 희망래일 대륙학교 14기 오명윤

 

김순조 기자  dd9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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