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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관잡록(稗官雜錄)](29) 산파 박자혜미래를 낳는 산모,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의 삶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7.08 19:18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 한쪽에 「박자혜 산파 터」 표석이 있다. 대한간호협회(회장 신경림)가 간호역사뿌리찾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2020년 1월22일 종로구청과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 신청한 표석 설치 件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가 심의하여 같은 해 8월26일 지금의 위치에 표석을 설치했다.

표석에는 “박자혜(1895∼1943) 간호사가 산파를 개원한 곳이다. 박자혜는 3·1운동 때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로 활동하며 나석주 열사의 의거(1926년)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28년 12월12일자 동아일보의 「신채호 부인 방문기」 기사는 “냉돌(冷突)에 기장(飢膓) 쥐고 모슬(母膝)에 양아제읍(兩兒啼泣)”이라는 제목으로 ‘三旬에 九食으로 三母子 겨우 연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홀로 어린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 시내 인사동 69번지 앞거리를 지내노라면 ‘산파(産婆) 박자혜(朴慈惠)’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이 붙어 있어서 추운 날 저녁 병에 음산한 기분을 자아내니 이 집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거개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 가정이다.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 있는 것을 말하나 기실은 아모 쓸데가 없는 물건으로 요사이에는 그도 운수가 같은지 산파가 원채 많은 관계인지 10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서 돈을 벌어보기는커녕 간판 붙여놓는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임으로 자연 그의 아궁지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 될까 말까 하야 말과 같은 삼순구식의 참상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형무소가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라 한다.”

 

1928년 12월12일(수)자 동아일보 5면에 관련 내용과 함께 박자혜 여사와 산파 문패 사진이 게재돼 있다.

 

박자혜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있던 해 12월11일 수유리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애기나인으로 입궐해 궁중생활을 하다가 1910년 국권피탈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1911년 출궁했다. 이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서 공부하고 1914년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산파면허를 취득했다. 1916년경부터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부로 근무하던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자가 줄을 잇는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4명의 동료와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결성, 3월10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동맹파업을 주도했다. 일경은 선생을 ‘악질적인 여자’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 자’로 규정했다.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넘어가 회문대학(연경대학) 의예과 재학 중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15살 연상(25세-40세)의 신채호를 만나 1920년 혼인했다.

부부이자 동지로써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두 사람은 여느 독립운동가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자혜 선생은 경제적 곤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선의 아이를 이역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남편에게 전하고, 1922년 두 살 큰아이(수범)를 데리고 작은아이(두범)를 임신한 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종로구 조선극장 뒷골목에 ‘産婆 朴慈惠’ 간판을 걸고 전문 조산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중국과 국내의 연락을 중개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6년 국내에 밀파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사의 의거도 박자혜 선생의 경성길 안내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36년, 일경에 체포(1929)돼 10년형을 언도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남편 신채호가 투옥 8년 만에 쓰러졌다는 급전을 받은 선생은 급히 뤼순으로 향했으나, 신채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21일, 57세에 옥중 순국하며 찬란한 불굴의 삶을 마감했다. 남편의 만기 출소만 기다리던 박자혜 선생에게는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슬픔, 설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산원 벌이도 시원치 않아 선생의 삶은 더욱 곤궁하던 차에 큰아들 수범은 만주로 떠나보내고, 열다섯 작은아들 두범은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잃고 말았다. 가족을 모두 잃은 선생은 힘겨운 삶을 이어가다가 유일한 희망인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16일 단칸 셋방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고, 2008년에야 남편 신채호의 고향인 충북 청원 고령신씨 선산에 합폄(유골 없는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자혜 산파 터에서 불과 800m 거리 중학동에 주한일본대사관이 있고, 율곡로2길을 사이에 둔 수송동에 2011년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매주 수요일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알리는 단체와 그에 맞서는 보수세력 간 대치가 반복되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와 이제 그 자리를 상당수 대체한 또다른 외세와 또 그 외세에 편승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기회주의자의 행태가 뭉쳐져 우리 사회의 통합과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미래를 낳는 산모는 많지만,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는 드물다. 조국광복을 낳는데 일조한 박자혜 산파의 자비로운(慈) 은혜(惠)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에 설치된 박자혜 산파 터(朴慈惠 産婆址) 표지석

변자형 기자  asadan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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