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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63주기 추모식 열려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미래세대에 죽산정신 이어갈 것”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8.01 19:38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3주기 추모식이 7월31일 오전 11시, 망우리 묘역에서 열렸다.

정정현 작가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식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죽산이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1시에 맞춰 시작했다. 추모식은 △순국선열과 조국통일에 헌신한 분들에 대한 묵념 △죽산 육성(1956년 11월10일 진보당 창당대회) 청취 △환영사 △추도사 △분향 및 헌화 △음식나눔 순으로 엄수됐다.

이모세 회장(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은 인사말을 통해 “죽산의 동지들과 따님 조호정 여사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2011년 사법적인 명예회복은 이루었으나,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민주·인권·평등·평화에 대한 ‘조봉암정신’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패러다임을 바꿔 청년과 학생들을 위한 문화 콘텐츠 개발 등에 진력해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행숙 문화복지정무부시장(인천광역시)은 “어렵고 복잡한 일과 직면할 때마다 죽산의 정신은 인천이 나아가는 길에 등불이 돼 주었다”며 “인천은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소중한 자산인 죽산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추모했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건국대 정치외교학과)는 추도사 중간에 “죽산은 차기 대권을 노리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및 그 추종세력의 음모에 죽었다”고 전제한 뒤 “죽산에 대한 서훈은 굴곡진 현대사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으니, 죽산 해원(解寃)의 마지막 작업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다시 신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위원·위원장(2009~2021)을 지냈다.

청년들의 추도사도 이어졌다. 조은주 청년활동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억압과 부패를 혁신하여 진정한 자유와 평화 속에서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는 복지국가”를 역설한 죽산의 진보당 결당대회 개회사를 인용하며 서두를 열었다. 조 활동가는 “목숨을 잃을 각오로 위험한 일터에 내몰린 청년, 사회복지 사각지대에서 고독사하거나 자살하는 청년들을 보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며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혁신정치와 경제정의 실천을 주장했던 죽산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의(義)로움과 이(利)로움을 조화롭게 추구한 죽산의 궤적을 더 많은 청년시민과 되새기고 확대하며 꿋꿋하게 걸어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윤준수 학생(전북대 정치외교학과)은 “혹자는 불만을 표시하지만, 죽산이 이승만 정권의 장관직 제의를 수락하지 않았다면 농지개혁법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며 죽산의 내각 참여를 ‘신의 한 수’로 칭송했다.

 

죽산 조봉암(1899~1959) 63주기 추모식이 7월31일(日) 오전 11시, 서울 망우리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추모식 말미에 발언에 나선 전현수 교수(경북대 사학과)는 “경북대 아시아연구소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9년부터 진보당 혁신계 형사사건 기록을 연구하고 있는데 진보당 조봉암 관련 서류는 1만6천장 정도의 방대한 사료로 구성돼 있다”면서 “위대한 항일독립투사이자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죽산은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농지개혁법을 제정해 실천에 옮겼다. 사회주의가 스탈린 전체주의로 흐르자 민주적 사회주의로 사상적 대전환을 시도해 진보당을 만들었다.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주화, 통일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진보당과 조봉암을 연구해 재조명하고 후세에 전승하겠다”고 전했다.

정치권에선 김교흥(민주당/인천 서구갑) 국회의원이 추모식에 참석했고, 이재명(민주당/인천 계양을), 박찬대(민주당/인천 연수갑), 심상정(정의당/경기 고양갑) 국회의원이 조화를 보내 죽산의 뜻을 기렸다. 김교흥 의원은 “죽산 선생은 제헌의회 때 인천 을구 출신으로 지역구 대선배시다. 지금처럼 민생파탄에 국가가 위기 속에 있는 시점에 죽산의 정신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며 “역사의 질곡을 바로 잡는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 청년들에게 시대정신을 제대로 심어주는 의미 있는 추모식이 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모식은 100명 내외 참석자의 분향 및 헌화로 마무리됐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강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일제 치하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이때 죽산은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가운데 세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잃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에도 일제 헌병대의 요시찰 인물에 대한 예비검속에 걸려 정치범으로 구속됐다가 해방 이후 석방됐다. 

1946년 5월 박헌영과 결별,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고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다. 1948년 5월10일 인천을구(현재 부평·계양·서구)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헌법기초의원, 초대 농림부장관에 이어 제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강제로 땅을 뺏는 게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했으며, 지금의 농업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죽산은 1952년 8월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고, 1956년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30%가 넘게 얻은 지지율(=216만표)을 토대로 같은 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간첩죄로 체포돼 1심에서 징역 5년, 2·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교수형으로 서거했다. 2011년 대한민국 법원은 재심을 통해 죽산 조봉암 선생의 간첩죄 등을 52년 만에 무죄로 선고했다.

 

죽산의 묘비는 뒷면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비(白碑)다. 유족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실현되면 비를 새로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변자형 기자  asadan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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