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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백성인가, 내 백성인가?출 32:7-14
   

한신대 구약학 김창주 교수

아론과 백성들이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절하고 앉아서 먹고 마시고 뛰논다’(출 32:6). 하나님이 진노하자 모세가 중재에 나서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네 백성’(your people)이라고 칭하고 모세 역시 하나님께 간청할 때도 이스라엘을 ‘네 백성’으로 부른다. 마치 하나님과 모세가 이스라엘은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떠넘기는 형국이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진노의 대상이나 모세에게는 자비의 대상이 된다. 정작 이집트에서 고난당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내 백성’(my people)이었다(출 3:7).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엘로힘이라’고 고백한다(4,8절). <개역개정>은 ‘너희의 신’ 단수로 번역한다. 이 문장의 지시 대명사 ‘이’(these)와 동사의 복수형은 ‘엘로힘’과 일치한다(1, 23절에도 엘로힘과 동사 복수형이 함께 나온다). 엘로힘은 복수형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가리킬 때는 단수로 취급되어 단수 동사가 뒤따른다. 한편 느헤미야 연설에서 이 구절은 단수로 언급되는데(느 9:18) 후대의 손질로 보인다. 이 본문과 가까운 것은 아무래도 여로보암이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장면인데 동사의 복수형은 물론 문자적으로 거의 일치한다(왕상 12:28).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8)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두 구절을 나란히 놓고 보면 금송아지 신상이 마치 십계명의 하나님과 거의 똑같이 묘사된 인상을 준다. 게다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8절)는 십계명의 우상금지 명령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중세 랍비 벤 메이르는 백성들이 금송아지 상을 야웨 하나님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오히려 금송아지 상이 하나님의 신비를 알려줄 상징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론이 백성들의 수준에 허용되는 하나님을 표현하려 했다면, 모세는 보이지 않지만 전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했고,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예배 태도를 중요시 여긴 것이다. 금송아지 사건은 한 마디로 물적 상징과 영적 상징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아니라 ‘네 백성’이라며 격분한다.

야웨는 이스라엘을 모세의 백성이라고 멀리 두다가 이번에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며 ‘이 백성’(this people)으로 칭한다(9절). 하나님과 상관없는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여긴 셈이다. 이스라엘을 ‘네 백성’이라고 할 때는 모세의 중재와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백성’이라는 비인칭 묘사는 이스라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무너졌거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자 모세는 ‘주의 백성’(your people)에 대한 진노를 거둬달라고 기도한다. 모세는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근거로 달려든다. 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다. ②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정에서 나타났다. ③ 이스라엘의 진멸은 이집트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④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이 아니냐는 항변이다.

‘내 백성’(my people)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로 출애굽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쓰였다(출 3:7, 10; 5:1; 6:7; 7:4, 16; 8:1, 8, 20, 21-23; 9:1, 13, 17; 10:3,4; 12:31). 위 단락에서 ‘네 백성’이 두 차례 언급되는 것은 둘의 관계에 큰 균열을 암시한다. ‘이 백성’은 목이 뻣뻣하다는 뜻으로 한 번 나오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친밀한 2인칭적인 관계가 아니라 3인칭의 거리감을 내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 중의 이스라엘을 찾아가 ‘내 백성’이라 부른다(출 22:25; 레 26:12; 사 52:5).

김창주 교수  webmaster@kidok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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