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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전세` / 박지웅
김순조 기자 | 승인 2023.03.04 20:53

                라일락 전세
 
                                        박지웅

라일락에 세 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살림이라곤 바람에 뒤젖히며 열리는 창문들
비 오는 날이면 훌쩍거리던 푸른 천장들
골목으로 들어온 햇살이 공중의 옆구리에 창을 내면
새는 긴 가지를 물어 구름과 집 사이에 걸었다
그렇게 새와 바람이 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따라가면 하늘이 어느덧 가까웠다
봄날 라일락꽃이 방 안에 돋으면
나는 꽃에 밀려 자꾸만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인은 봄마다 방값을 올려 달랬으나
꽃 피면 올라왔다가 꽃 지면 내려갔다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 나는 라일락 꼭대기에 앉아
골목과 지붕을 지나는 고양이나 겸연쩍게 헤아렸다
저물녘 멀리 마을버스가 들어오고 이웃들이
약국 앞 세탁소 앞 수선집 앞에서 내려 오순도순
모두 라일락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기뻤다
그때 밤하늘은 여전히 신생대였고
그 별자리에 세 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골목 안에 라일락이 있었는지
나무 안에 우리가 살았는지 가물거리는



고교 시절 엄마가 미니 이층집을 사주어서 그때를 빼고는 이사를 해마다 다녔던 걸 기억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많이 동네를 거쳤어요? 그렇다니까요.
어려서는 때마다 이사를 하게 된 연유를 몰랐었다. 결혼을 하고는 십여 년 동안 이사를 한동네에서 여섯 번을 했었다. 어느 집엔 라일락이. 또 다른 집들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사를 참 많이 한다고 일본인 유학생이 말했었다. 직장에서 집까지 걷는 시간을 단축하려는 가장을 위해서였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였다. 이른 봄이면 한그루 매화꽃의 향이 퍼지는 길을 지나는 지금의 집에서는 거의 30년을 머무르고 있다.

 

그림 박영수

김순조 기자  dd9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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