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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 봉행문경 박열의사기념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 개최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7.24 21:13

가네코 후미코(박문자, 1903~1926) 지사 96주기 추도식 및 워크숍이 7월23일(土) 오전과 오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기념공원 내 묘역과 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도식은 지역 내 정관계인사와 지역주민, (사)국민문화연구소 회원, 한터역사문화연구회(네이버밴드) 멤버들이 함께한 가운데 약력보고, 추도사, 헌화와 분향 순으로 1시간가량 진행됐다. 특히 추도사에는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장인 사토 노부코(佐藤信子)氏가 전해온 연대의 인사말이 대독돼 의미를 더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지사 96주기 추도식이 7월23일(토) 10시30분, 박열의사기념공원 안에 모신 지사의 묘역에서 봉행됐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1903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당시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無籍者)여서 소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했다. 이후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 고모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부강심상소학교에 적을 두고 약 7년 동안 학대받으며 부엌데기를 했다. 가네코는 1919년 부강 3·1만세운동을 목격하면서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라고 기록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관계자와 교류하고 각종 문헌을 읽으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2년 도쿄에 유학 중이던 문경 출신의 박열을 만나 동거를 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천황제에 대한 투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 발생 이틀 후, 일제의 한인 단속에 부부는 불령사(不逞社)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이 알려지자 일제는 이를 천황 암살을 도모한 대역사건으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는데, 10일 만에 이례적으로 ‘천황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부부는 서로 다른 지역의 형무소로 이감됐다. 3개월 후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아이를 밴 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동지들의 사인규명과 시신인도 요구가 묵살되어 타살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박열의 형 박정식이 제수씨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제는 문제가 있는 유골이라 잘못돼서는 안 된다면서 유골을 소포로 상주경찰서로 보냈다. 가네코의 유골은 남편의 고향인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8㎞ 북쪽의 팔영리 산중턱에 묻혀 방치돼 오다가 2003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사후 92년이 지난 2018년 가네코 후미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2004년 애족장)에 이어 2번째 서훈이다. 남편 박열 의사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유일한 한일 부부 서훈자이기도 하다.

 

박열의사기념관 1, 2층에 전시된 초등학생들의 기록화. 박열-가네코 후미코가 조선의 옷을 입고 일제 검사·판사를 상대로 법정 투쟁하는 모습을 어린 학생들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은 이날 오후 1시부터 3시50분까지 박열의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1,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워크숍의 첫 순서는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16개월 동안 발간한 3가지 제호에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에 대한 발제로 시작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잡지 ‘黑濤’의 제호는 아나키즘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에스페란토어 ‘LA NIGRA OND’가 병기되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절대자유를 강조한 아나키즘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흑도 폐간 후 발행한 ‘후토이 센징’(담대한 선인)은 검열 당국이 ‘후테이 센징’(不逞鮮人, 못된 조선놈)의 사용을 불허하여 엇비슷한 발음의 월간 잡지로 발간한 것이다. ‘흑도’와 달리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을 담았고, 박열의 아나키즘 예술론도 엿볼 수 있다. ‘후토이 센징’마저 과격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자 제호를 바꿔 3, 4호를 발간한 ‘現社會’는 당시 일제가 안고 있던 각종 모순을 비판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발간한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의 기사 투고자나 광고 참여자에는 1920년대 초 일본의 거의 모든 아나키즘 운동, 마르크시즘 운동 계열의 인물 및 단체가 포함되어 있다.

 

7월23일(토) 오후, 한국아니키즘학회장을 지낸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두 번째 발제에서 성주현 교수(1923제노사이드연구소)는 「해방 후 박열과 재일한인사회」를 고찰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은 22년 2개월이라는 수감기록을 세우면서 1945년 10월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를 출소했다. 이후 신조선건설동맹(건동) 초대위원장,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거류민단)과 후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의 초대단장을 역임하면서 재일한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도쿄를 방문, 박열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고, 박열은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노선을 택했다. 이는 이강훈, 원심창 등 단독정부 수립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는 그룹의 배제와 이탈을 가져왔다.
또한, 군국주의의 복멸과 천황제 타도를 주장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김천해와 달리 박열은 천황제 인정과 일본 내정 불간섭을 천명하여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의 위상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해방 후부터 1949년 영구 귀국까지 5년간 박열의 재일한인사회 활동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 세 번째 발제는 신진희 학예연구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가 「박열 연구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주 내용은 1920년대 초반 일본과 조선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메이커 박열의 생애사, 사상사, 독립운동사 연구를 더듬어 정리한 것이다. 발제문에 아나키즘과 독립운동 분야를 나누어 서술하였지만 둘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발제 제목과 달리 연구 전망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있었다.

전반부의 3개 발제에 따른 후반부 지정토론 시간은 김명섭 교수(단국대)가 좌장 사회를 맡았다. 조동범 교수(중앙대), 김인덕 교수(청암대), 강윤정 교수(안동대)가 지정토론에 나섰고, 이어 질의응답 시간으로 워크숍을 마쳤다.

한편, 이날 추모식·워크숍은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가 실무를 맡고, 역사나그네 손병주 회장(성남역사문화답사회)이 60명 규모의 추모단을 이끌면서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전경  [아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묘역

변자형 기자  asadan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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